시뮬라시옹과 포스트-재현 - 알고리즘 아트를 중심으로

논문지 기호학연구 56집 조회수 1033
저자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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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부터 지속되어 온 재현체계에 관한 포스트모던 철학의 비판은 시각
주체의 경험과 대상을 분리하고, 환경과 인간을 분리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체계에 관
한 비판으로 궤를 같이 한다. 1960년대 포스트모던한 흐름으로 등장한 일련의 작품에
서 강조된 상호작용성은 1990년대 후반 디지털 아트의 인터랙티브한 차원으로 계승되
었다. 디지털 아트의 핵심적인 특성은 현장에서 관객의 참여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결과 혹은 저마다의 미세한 변화를 반영한 무한대의 변이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기존 프로그램을 그대로 차용하
는 것이 아니라, 아티스트가 직접 알고리즘을 작성하고 프로그래밍하는 경우 혹은 프
로그래머와 협업을 통해 고유한 알고리즘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프로그래밍 자체를 창작 행위로 간주해야 하는 패러다임으로 전환되는 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현재 주목받고 있는 시뮬레이션과 VR 기술은 현실의 감각과 시공간을
재현해내는 기술로 각광받고 있는데, 시뮬레이션 기술이 예술 분야에 도입되면서, 실
험적인 작품들이 창작되는 중이다.
장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시뮬라시옹 개념은 ‘어떤 현실을 본따 매우 사실적으로 만
듦’을 대변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실재하는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전혀 다른
현실’을 주목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이때 시뮬라시옹은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따질 주
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없는, 전통적인 실재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실재를
지칭한다.
전통적인 질서에서 이미지가 실재 세계의 재현에 대응했다면, 알고리즘 아트의 시
뮬레이션 이미지들 그리고 시뮬레이션된 시공간은 ‘체험을 용이하게 만드는 예술 형
식’이라 할 수 있다. 다수의 알고리즘 아트는 상황, 현실, 생태계, 생명체 등의 복합적
인 속성을 시스템으로 모델화하여 (특정 혹은 개별) 대상을 구조화하고 활성화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으며, 세계의 시뮬라시옹에 주목한다. 본 논문에서는 세계의 시뮬라시
옹을 다루는 이안 쳉의 작품을 통해, 21세기 인공지능 기술의 등장과 함께 변화하고
있는 문화예술의 패러다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안 쳉의 라이브 시뮬레이션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콘텐츠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 역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사실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대면하는 순간은 전통적인 형식의 작품보다 훨씬 더 능동
적인 입장을 요구한다. 본 논문이 제시하는 포스트-재현 형식의 문화예술 작품은 개인
적인 경험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감각과 지각 과정이 완성이나 종결로 수렴될 수 없음
을 기술로 구현하고 있다. 이때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능동적 인식과 상황적
지식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